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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구 라디오

알아서 해 드릴게요

왕구생각 2021. 11. 12.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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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이라는 방증의 하나로 나는 머리털을 꼽는다. 동물이 털로 자신의 멋을 뽐내듯 사람은 옷으로 자신을 꾸며 보인다. 그런데 사람도 멋을 낼 털을 이용한다. 남자든 여자든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머리털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신혼 초에 아내가 머리를 하러 간다기에 미용실을 따라갔다. 별 생각 없이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괜찮겠냐고 물었다. 도대체 뭐가 안 괜찮길래. 상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이미 뱉어놓은 말이니 중간에 번복하기엔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 같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서로 눈에서 꿀 떨어지던 시절이라(물론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믿어 달라구.) 이해심 많고 말 그대로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지만 힘들었다. 왜 머리 하는데 4시간이나 걸리는 거냐고. 차라리 그 시간 동안 읽을 책이라도 가지고 갔더라면 좋았을 걸. 왜 미용실에 여성 잡지들이 그렇게 빼곡히 놓여 있는지 그때 이해했다. 게다가 비용 면에서도 남자인 내가 납득하기엔 너무 비쌌다. 나중에 내 남동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자들도 미용실에서 커트가 아닌 펌을 하면 제법 돈이 많이 나가는 거였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그래서 내가 매력적이지 않은가 보다.) 머리털을 가꾸기 위해 그 시간과 비용을 들이다니. 나 같은 인간은 내 머리나 남의 머리나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 길지만 않으면 그냥 머리 감고 말리고 빗질 몇 번 하고가 끝이다. 머리 손질에 10분 이상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머리 커트도 대학생 때까지 미용실이 아닌 집 앞 이발소를 다녔고, 제대 후에도 (이사 간 곳에 이발소가 없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블루클럽 같은 남성 전용 헤어클럽을 갔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초등학교 때는 고정관념에 사라잡힌 답답한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자는 미장원, 남자는 이발소로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난 초등학교 6년 동안 집 앞 이발소와 단골을 텄다.

중학교 때는 지금과 달이 모든 학생이 스포츠형 머리를 해야 해서 짧은 머리로 3년을 보냈다. 친구들 중에는 조금이라도 머리를 길러 보겠다고 선생님과 학생 선도부 눈을 피해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내 머리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머리 감고 말리기는 시간이 짧아서 오히려 좋았다. 

중3이 끝날 무렵부터 애들은 당당히 머리를 기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그때는 내버려 두었다. 나도 그럴까 하다가 귀찮기도 해서 그냥 중3 겨울 방학 때도 같은 스타일을 유지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이제 머리를 좀 기르나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스포츠형 머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는 학교 전통(?)으로 스포츠형 머리를 고수한다고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생부장 선생님이 단호하게 안내(?)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학생 인권 조례 때문인지 후배들은 머리를 자유롭게 기르고 다니지만. 아무튼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 모두를 난 스포츠형 머리로 유지했다. 이때도 별 불편함이 없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머리털을 가꾸겠나. 난 그 누구가 없는데.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니 그래도 성인인데 학생 때처럼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이 정도 나이에 스포츠형이라면 나이가 들어보이는 고등학생이든지 군인이든지 둘 중 하나의 영역으로 소속돼 버릴 것 같았다. 물론 후자에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서 안 어울리지만 머리를 길렀다. 전문가의 손길을 받지 않고 그냥 무작정 길렀다. 이 당시의 내 사진을 보면 흑역사가 따로 없다. 그냥 털 손질을 하지 않은 야생마 같은 느낌이다. 머리 손질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느낀 시기긴 했는데, 그 기간도 다행스럽게 짧았다. 2년 남짓이었을까.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부터 학군단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면서 머리를 다시 스포츠형으로 되돌려 놓았다. 정말 군인의 영역에 속하게 된 거다. 이때부터 나는 장장 4년 반을 다시 스포츠형 머리로 살았다. 그러니까 나는 중고등학교 6년, 대학과 군생활 4년 반, 합쳐서 10년 반을 스포츠형 머리로 지낸 거다. 그래서 오히려 제대 후에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을 땐 어색했다. 머리가 어느 정도 길러서 (이제는 사라진 이발소를 찾다) 미용실에 들어갔더니 이때부터 세상에서 나한테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인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TV를 보면 연예인 누구 스타일로 잘라 주세요, 라고 많이들 하던데 내가 그렇게 생기지 않은 걸 아는데 머리만 그 모양을 유지한다고 달라질까. 그리고 10년 넘게 짧은 머릴 유지하다 보니 긴 머리를 어떻게 잘라 달라고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묘수를 찾아냈다. 나와 비슷한 머리스타일을 유지해 왔던 친구가 머리를 자를 때 같이 갔다가 뭐라고 하는지 듣기로 한 거다. 일종의 벤치마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기대했던 대답과는 달라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그냥 좀 길어서 그러니 다듬어 주세요."와. 이렇게 허무할 때가.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였어? 그랬더니 미용사 분이 알아서 잘라주시더라. 중간 중간 앞머리 길이는 어떠냐, 구레나룻은 이 정도면 괜찮냐고 중간 중간 물어보시는데 저러면 되겠지 싶어 다음 번 머리를 자를 때부터 나도 따라했다. 하지만 '다듬어 주세요'는 '전권을 당신에게 맡깁니다'와 같은 의미라 미용사에 따라 그 결과가 좌지우지 되는 일이 많았고, 난 그냥 다음 이발 때까지 내 머리를 감당해야 했다. 그렇다고 머리 스타일에 그렇게 실망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웬만하면 그냥 잘라주는 대로 머리에 털을 달고 살았다.

한마디로 말해 난 외모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는 말을 이렇게 길게 풀어본 거다. 어제 거의 두 달 보름만에 머리를 잘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기도 하고 바람에 머리가 한쪽으로 쏠릴 때 두피가 아파서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머리를 자르러 간 것이다.

이번 미용사 분은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분이었다. 왜냐 하면 최고의 말로 날 대우해줬으니까."어떻게 잘라 드릴까요?""네, 그냥 좀 길어서요.""네, 그럼 알아서 잘라 드릴게요."'알아서'라는 말, 인공지능 로봇에게 인간이 바라는 궁극의 메세지, 세상에서 마음을 제일 편하게 해 주는 그 말로 내 마음과 머리를 편하게 해 주셨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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