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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구 라디오

열쇠를 꽂아 보아도

왕구생각 2021. 11. 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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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웬만한 거리(지하철 역 한두 정거정 정도까지)는 걸어다니기 때문에 굳이 지갑이 필요가 없다. 예전에 집과 회사 거리가 멀어서 차를 운전해야 했을 땐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몇 가지 사건(이 부분은 나중에)을 겪은 후론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으려 한다. 지갑을 안 가지고 다니기 위해 회사를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랬더니 출근할 때 차도 필요 없다. (그래서 우리 차는 몇 년째 연간 3,000km 이하로 달리고 있다. 보험회사에서 싫어하려나?) 차를 안 갖고 다니니 열쇠도 필요 없게 됐고 출근할 때 가방엔 수첩, 필통(난 꼭 볼펜과 샤프, 지우개가 하나씩 담긴 필통을 갖고 다닌다.), 텀블러, 읽을 책 정도만 넣고 다닌다. 사무실(교실) 열쇠도 안 갖고 다닌다. 내가 집에 교실 열쇠를 가져갔다가 가방을 바꾸거나 해서 열쇠를 잊을까봐 열쇠는 교실 밖 인근 어딘가에 두고 다닌다. 이 장소는 비밀이다.(다들 아는데 혹시 나만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오늘 출근을 하자마자 황당한 일을 겪었다. 평소 같으면 내 비밀장소에서 열쇠를 꺼내, 문고리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는 비의식적인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문을 열었다. 이 과정엔 어려움도 없고 수년 간 나한테 너무 자동화 된 프로세스라 중간에 어떤 의식적인 조심스러움이나 주의 같은 게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말 그대로 살짝 비틀어 문을 여는 게 전부였다. 그 자연스럽고 자동화 되어 도미노 쓰러지듯 모든 게 차례차례 진행되어야 할 일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 열쇠가 안 돌아 가는 것이었다. 처음엔 으잉? 하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열쇠가 끝까지 안 들어간 건 아닌지 의심하며 열쇠를 깊이 넣어 다시 돌렸다. 역시 안 열렸다. 이번엔 열쇠를 뽑아서 다시 넣었다. 똑같다. 다시 빼서 천천히 자물쇠의 걸쇠가 열쇠의 굴곡을 받아들이는 걸 손끝으로 느끼면서 다시 꽂았다. 또 마찬가지다. 이 과정을 그 자리에서 한 5분 정도 반복했다. 이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문제가 있었던 실제 문

1층으로 내려와 시설 주무관님을 찾았다. 사정을 말씀드렸다. 문이 안 열려서 교실에 못 들어가고 있다고. (다행히 올해 나는 반 아이들이 없이 혼자 교실을 쓰는 전담교사라 학생 맞이를 하지 않아도 되서 아침 시간에 여유가 있다.) 주무관님께서 마스터키(인지 모르겠지만 열쇠 꾸러미)를 들고 내 사무실로 가셨다. (뭔가 다른 방법을 이용하실 줄 알았는데) 나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셨다. 그러다가 뒷문(이 문 열쇠는 나한텐 없다.)으로 가셔서 마스터키로 문을 여신 다음 교실 안에서 앞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여셨다. 난 잘 모르겠으나 문 손잡이가 뭐에 걸렸다고 하셨다. 그게 뭘까? 내가 뭘 넣진 않았는데. 문고리 안의 내부적인 기계적 걸림이 있었던 걸까? 지금은 열렸지만 내일 또 걸리면 어떻게 하지? 아예 문고리를 바꿔주시면 어떨까? 

문이 열려서 교실에 들어와 한시름 놓았다. 주무관님께 아침부터 4층(내가 있는 곳은 4층 서편 끝)까지 올라오게 해 드려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평소 인상 좋으신 주무관님답게 허허 한 번 웃으시면서 곧장 다시 내려가셨다. 나는 열쇠를 가져와 다시 앞문이 열린 상태에서 열쇠로 문을 여닫길 여러 번 해 봤다. 평소처럼 계속 잘 됐다. 그런데 오늘만 문제가 생겼었잖아. 내일 아침도 안 그러라는 보장은 없는데. 

솔직히 난 주무관님이 오후에라도 문고리를 통째로 바꿔주시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계속 같은 문제가 생기면 매번 올라오셔야 하기도 하고 문제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편이 나으니까. 직접 말로 요구하지도 않고 나중에 기대만 하고 있었다.

세상엔 본인이 상대에게 표현도 요구하지도 않았으면서 상대가 알아서 뭔가를 해주길 바라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입장 바꿔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똑같지 않았겠다. 그 짧은 순간에, 그 바쁜 아침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와중에.

그런데 여기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말하지 않아도 해 주는 사람과 말하지 않았다고 요구한 부분까지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더 끌리겠나? 당연히 전자일 게 뻔하다. 상대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게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도 크게 빚지는 일이 아닐 때,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도와주면 모두에게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다고 친절맨처럼 자기 일은 뒷전으로 한 채 남만 도우러 다니는 실속 없는 사람이 되자는 말은 아니다. 호구가 될 정도까지 나서진 말고 조금 더 적극적인 친절로 상대와 내가 기분 좋아질 수 있겠다는 말이다. 

분명 예전에도 난 별로 힘들게 해 준 일이 아니었는데 어떤 사람은 내 호의로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넨 경험이 있다. 너무 과할 정도로 인사를 해서 민망할 정도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때의 기분, 서로에게 기분 좋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는 호의. 그런 것이 빡빡한 세상을 부드럽게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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