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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아침부터 시커먼 구름이 해를 가렸다. 하늘만 보고선 몇 신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기 예보에선 비 소식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엄마는 이 동네 날씨는 일기 예보대로 된 적이 거의 없다며 아빠 출근길에 우산을 챙겨 주셨다. 아빠가 출근한 뒤 나도 유치원 버스를 탔다. 김인애 선생님 대신 임시 선생님이 오신 지도 벌써 나흘째다. 임시 선생님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선생님이 빨리 돌아오시길 속으로 바라고 있다. 작년부터 김인애 선생님 반이기도 했고 선생님은 나한테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유치원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들과 놀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 한쪽에서 선생님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간중간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고, 손으로 입을 가리는 등 누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표정이 안 좋게 바뀌었다. 오늘 선생님들의 대화는 평소 아침마다 습관처럼 이루어지던 그저 그런 수다와 달랐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 중인지 옆에서 조금 엿듣고 싶었지만, 나를 발견한 임시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수업 시작 전, 임시 선생님이 우리 모두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바로 원장 선생님이 우리 교실로 들어왔다. 원장 선생님이 등·하원 때 유치원 마당에 나와 인사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교실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 아침 날씨가 이상하더니 유치원도 날씨 따라 이상해진 건가. 임시 선생님이 우리를 조용히 시켰다. 분위기가 잡힌 걸 보고 원장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햇살반 친구들, 오늘 날씨가 참 흐렸죠? 그래도 비는 안 온다고 해요. 야외 활동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에요. 오늘 원장 선생님이 햇살반 친구들한테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잘 들을 수 있죠?”

, , 선생님!”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평소처럼 흥겹게 대답했다.

원장 선생님은 우리의 활기찬 대답과 달리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여러분을 가르쳐 주셨던 김인애 선생님이 급한 사정이 생겨서 더 이상 유치원에 못 나오시게 됐어요. 여러분한테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나게 돼서 미안하다며 원장 선생님한테 대신 인사를 전해 달라고 했어요. 앞으로 여기 계신 정현희 선생님께서 여러분들을 가르쳐 주실 거예요. 지금도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햇살반이었지요? 앞으로도 계속 착한 햇살반이 돼 주세요요.”

원장 선생님이 말을 마친 후 우리는 모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우리 교실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릴 때쯤 내 옆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짝꿍, 호기심 대장 연희였다. 연희가 일어서는 모습에 친구들이 모두 연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에 있던 임시 선생님과 원장 선생님도 연희를 바라봤다. 두 분 다 무슨 일인지 묻는 눈치였다.

김인애 선생님이 갑자기 못 나오시는 이유가 뭐예요?”

연희는 똘망똘망한 눈빛과 분명한 목소리로 원장 선생님을 향해 질문을 쏘았다. 연희는 우리들의 시선을 조종했다. 연희가 말할 때 우리는 모두 연희를 바라봤고, 말끝에서 물음표가 던져졌을 땐 질문의 화살이 꽂힌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질문의 화살을 맞고도 끄떡없었다. 임시 선생님과 눈빛을 한 번 교환한 뒤, 원장 선생님은 그대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옆 친구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희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오기가 생긴 듯 임시 선생님께 쪼르르 걸어가 다시 똑같은 내용을 물었다. 하지만 임시 선생님은 연희에게 자리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말했을 뿐 연희가 원하는 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연희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해 입을 삐죽 내밀고 자리로 돌아와 내 옆에 앉았다. 나도 김인애 선생님을 못 만난다는 게 아쉽고 슬펐지만, 그 이유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시는가보다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옆에서 연희가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내 마음도 불편했다.

그날 하루, 우리는 유치원에서 이미 익숙해진 새 담임 선생님과 이상하고 어색한 하루를 보냈다.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는 평소처럼 내 하루를 물었다.

, 오늘부터 우리 선생님 안 오실 거래. 임시 선생님이 새 선생님이 됐어. 연희가 원장 선생님이랑 새 선생님한테 왜 안 오는지 물어봤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해 줘서 삐졌어.”

나는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철퍼덕 엎드려 누운 채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별거 아닌 일에도 그랬구나.”하고 대꾸해 주는 엄만데, 오늘은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자세를 고쳐 주방에 있는 엄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엄마는 싱크대 찬장을 마주 선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나는 엄마가 움직이지 않아서 마네킹이라도 된 줄 알았다.

엄마!” 내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려는 듯 엄마는 생각을 털어내는 것처럼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

왜 그렇게 멍하게 서 있어?”

아니야,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그래도 새 선생님도 좋지?”

하지만…… 좀 그래.”

새 선생님으로 바뀌었어도 유치원은 잘 다니는 거야. 알았지?”

임시 선생님이 새 선생님이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 선생님한테 작별 인사를 못해서 조금 아쉬워.”

그렇긴 하겠지.”

엄마는 다시 내 말에 곧잘 대꾸해 주었지만, 나는 대화 내내 엄마가 선생님 얘기를 일부러 피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작별 인사라는 말에 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 우리 선생님 전화번호 있지? 나 선생님한테 전화해 볼래.”

전화? ……선생님한테? ……지금은…… …… 좀 그렇잖아. 신혼여행 중이신데……. 여행하고 있는데 전화하면 방해 되잖아. 다음에, 다음에 기회 봐서 하자.”

엄마는 말을 얼버무리더니 주방 일을 할 것처럼 돌아섰다. 그러더니 금방 내 쪽을 다시 보면서 갑자기 화제를 바꾸고 날 야단쳤다.

그리고 시운이 너, 오늘 장난감 정리도 안 하고 유치원 갔어! 엄마가 몇 번을 말해? 물건 정리 좀 제때제때 하라고. 그렇게 소파에 누워 있지 말고 이제 들어가서 장난감 정리해!”

뒤로 갈수록 언성이 높아지는 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다. 내가 방을 어질러서 화가 많이 나셨던 건가? 내가 유치원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그래도 그렇지 심각하게 선생님 이야길 하는 중에 갑자기 장난감 정리를 하라니. 오늘은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이상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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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는 아직 어제의 분이 안 풀렸는지, 다른 때 같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친구들이랑 떠들기 한창일 텐데 오늘은 혼자 자기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도 표정이 굳어서 친구들도 연희 옆에 오지 않았다. 짝꿍이기도 하고 연희를 좋아하는 나로선 어쩔 수 없이 연희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밥을 먹고 친구들은 평소처럼 모두 놀이터로 놀러 갔다. 교실에는 연희랑 나만 남아 있었다. 연희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내가 먼저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연희야, 어제 김인애 선생님 왜 안 오시는지 대답 못 들어서 아직도 화난 거야?”

나름 위로해 준답시고 물어본 건데, 이 말이 연희를 더 화나게 했나 보다. 돌아온 대답과 반응이 의외였다. 연희는 오늘 모아둔 분노의 에너지를 단번에 쏟아내는 것처럼 나를 쏘아보며 무섭게 화를 냈다.

이 바보야! 그걸 아직도 몰라?”

미안.”

정말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한 게 아니다. 기가 눌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말해 놓고도 남의 기분 생각해 주다 나한테 불똥이 튄 것 같아서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안 좋은 애를 더 자극할 필요까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가 나한테 화를 계속 내서 나를 싫어하면 앞으로 나하고는 안 놀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차에 차라리 눈에 안 띄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연희가 좀 전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너한테 화내서…….”

연희의 사과로 나는 마음을 금세 바꿔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그런데 너 뭐 안 좋은 일이 있어?”

그때 유치원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제 곧 친구들이 교실로 우르르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너 정말 아무것도 몰라?”

……

참 답답하다, 너도. 이따 집에 가기 전에 얘기해 줄게.”

무슨 얘긴지도 모르면서 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연희는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유치원 오후 활동을 마치고 하원 버스를 타기 위해 친구들이 모두 마당으로 나가고 있었다. 연희는 점심시간 이후로 계속 입을 다물었다. 뭔가 얘기해 준다더니 잊어버린 건가? 둘러보니 선생님도 친구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난 평소에도 행동이 굼뜨고 느리지만, 연희는 가방 정리를 빠르게 끝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연희보다 먼저 가방을 멨다. 연희는 아까 가방에 넣었던 물통과 수저통을 다시 꺼내 책상에 올려뒀다가 다시 넣고 있었다. 지금 교실엔 연희와 나, 둘뿐이다.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우리를 찾기 위해 곧 선생님이 다시 올 것이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나한테 해 주겠다는 말이 뭐야? 너 일부러 가방 늦게 쌌잖아.”

너도 눈치가 아예 없진 않구나!”

놀리는 말투였다. 그래도 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기 위해 연희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 귓속말을 시작했다. 교실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는데도.

말을 마친 연희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난 다 듣고도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말을 한 게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끔뻑였다.

너도 못 믿겠지? 근데 어제 뉴스에도 나왔어. 선생님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때 새 선생님이 교실로 왔다.

시운아, 연희야, 왜 안 나오니? 친구들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난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연희가 나 대신 대답했다.

시운이가 물통을 잃어버려서 찾아 주고 있었어요. 지금 찾았으니까 갈게요.”

연희는 나를 팔짱에 끼워 데리고 나가면서 다시 귓속말로 속삭였다.

내 말이 진짠지 알고 싶으면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 엄마들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집에 오자마자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카레가 주방과 거실을 노란 냄새로 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카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엄마! 엄마도 알고 있었지? 김인애 선생님 돌아가신 거?”

난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말해 주셨어?”

난 더 큰 소리로 물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엄마도 알고 있었냐고?”

엄마와 나는 그저 서로를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치했다. 엄마가 먼저 그 불안한 균형을 무너트렸다.

아들, 여기 잠깐 앉아봐.”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어 두 손을 잡고 말을 시작했다.

어제 너 유치원에 가고 나서 원장 선생님한테 연락이 왔어. 아침 뉴스에 잠깐 나오기도 했고. 그런데 어제 하원해서 네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냥 정현희 선생님이 새 선생님이 됐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길래 엄마도 너한테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많았어. 그러다 네가 충격받고 너무 슬퍼할까 봐, 결국 말하지 못한 거야. 유치원을 일부러 떠나신 것도 아니고 신혼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니 불쌍해서 어떻게 하니? 엄마는 정말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리 아들이 걱정돼서 나중에 천천히 말해 주려고 했단 말이야.”

연희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오늘 연희가 축 처져 있었던 건 모든 걸 알게 됐기 때문이구나.

그래도 나한테 비밀로 했던 게 화가 나. 미리 알았더라면 연희한테 그런 소리는 안 들었을 텐데.”

미안해. 엄마는 아직 말해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연희한테 그런 소리 들었다는 건 뭐야?”

몰라. 연희는 이미 다 알고서 나한테…….”

난 말허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엄마랑 대화하다가 내가 놓치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을 찾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지? 그렇게 특이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내 기억의 서랍 한편에 처박아둔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재생됐다.

하얀색 자동차! 교통사고! 절벽! 구급차!

결혼식 때 내가 본 장면은 다른 나라였고, 마지막은 절벽 난간이 부서진 교통사고였다. 제주도에도 해안 도로가 있지만 그렇게 절벽처럼 높은 곳에 도로가 있을 리 없다. 엄마한테 물어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 선생님이 신혼여행을 어디로 갔다고 했지?”

난데없는 물음이었지만 엄마는 어제와 달리 바로 대답해 줬다.

하와이라고 했어. 뉴스에서도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난 신혼부부가 운전하던 차가 도로 밖 난간을 넘어 추락했다고 했으니까.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엄마가 대답해 주자마자 난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또 다음 질문을 퍼부었다.

차는? 선생님이 탄 차는 무슨 색이었어? 혹시 지붕이 없는 차야?”

그것까진 엄마도 몰라. 어제 뉴스에 나온 장면은 밤이기도 했고 차가 많이 찌그러져서 색이 잘 안 보였어. 그건 왜?”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묻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다. 선생님 결혼식 축가를 부르면서 본 그 장면, 내 시선을 따라다니며 네모난 구름 모양으로 허공에 떠 있던 장면은 지금 엄마가 설명해 준 사고와 너무 닮았다. 난 선생님이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 내가 본 장면은 해안가에 열대 나무들이 펼쳐져 있어서 하와이 같았다. 하긴 제주도도 그런 곳이 있다. 아니, 분위기가 여기와는 달랐어. 더 이상한 건 교통사고가 났다는 거야. 신혼여행을 간 부부가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얼마나 되겠어? 게다가 사고가 나기도 전에 미리 어디서 사고가 날지 맞히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거냐고? 모르긴 몰라도 내가 바닷가에서 하늘 위로 높이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이 물속에 떨어져 물고기를 맞힐 확률 정도 되겠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자세를 고쳐 천장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웠다. 평소 잠잘 때처럼 두 손을 가슴에 얹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도 충격인데 어쩌면 그 사고에 내가 모르는, 나와 관련된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밑 서랍을 뒤져 내 보물 상자를 꺼냈다. 작년 생일, 아빠가 미니 게임기를 선물로 주셨을 때 포장재로 쓴 상자다. 하드보드 재질에 안쪽이 코팅 처리된 튼튼한 종이 상자다. 버리기 아까워 그 상자에 내가 아끼는 물건들을 모아두었다. 내가 아기 때 입었다고 하는 배냇저고리, 4살 때부터 매년 엄마 아빠가 써 준 생일 카드,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스테고사우루스 그리고 프테라노돈 공룡 피규어 3종 세트, 작년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과 선물 교환으로 받은 작은 색연필 세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지난주 결혼식 때 아저씨한테 받은 목걸이를 추가시켰다. 이제는 아저씨의 유품이 되었지만, 선물로 받을 때만 해도 나한테는 간직해야 할 진짜 보물이었다.

목걸이를 꺼내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면서 아저씨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목걸이를 목에 걸고 노래를 부르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도대체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 거냐고? 연희랑 엄마랑 싸울 뻔했고, 선생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목걸이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특별한 능력이 무슨 능력인지 듣지 못했다. 목걸이를 받고 처음엔 혹부리 영감처럼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해 주는 능력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목걸이가 노래 실력을 높여주지 않았다는 건 노래를 부르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20명이 함께 노래 부르다 보니 나조차 내 목소리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으니까. 혹시 나한테만 보인 그 환영인가? 특별하고 신기하긴 했다. 영화관도 아닌데 허공에 영상이 떠다녔고, 거기에 내가 아는 사람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목걸이의 특별한 능력 때문에 그걸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아저씨의 말은 이것과 관련 없어 보인다. 이게 뭐 좋은 능력이라고.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은데…….

잠시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만약 노래 부를 때 나타난 구름 속 장면, 그것이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할 거라는 예언임을 알았더라면 내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웠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 난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날지 알 수 없었어. 그걸 어떻게 눈치채? 아저씨가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았는데. 그리고 만일 내가 알았다고 쳐, 나 같은 꼬맹이가 사고가 일어나는 장면을 미리 봤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 주기나 할까?

생각을 너무 오래 했나 보다. 사실도 아닌 일을 가지고 이리저리 생각만 하다 보니 점점 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됐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다. 아는 게 힘이라더니 모르는 게 약이었다.

목걸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펴봤다. 이걸 이렇게 자세히 보긴 처음이다. 각지게 깎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둥글게 생긴, 가운데의 커다랗고 투명한 푸른색 보석. 그 주변에 총총히 박힌 작고 하얀 보석들이 있다. 그때 봤던 것하고 똑같다. 모양이 달라질 리는 없다. 이런 걸 다이아몬드라고 하지? 지금 봐도 비싸 보인다. 펜던트를 뒤집어 뒷면을 봤다. 뒷면은 은처럼 하얀 금속으로만 덮여 있을 뿐 별다른 보석 장식이 없었다. 대신 가운데의 큰 보석을 감싸안고 있어서 그런지 뒷면이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그리고 중심과 주변을 가느다랗게 연결해 놓은 모양이 진짜 꽃잎처럼 보였다. 혹은 물방울이 튀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런데 중심부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뭔가를 발견했다. 지저분하고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글씨 같은 게 쓰여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는데 별로 효과가 없어서 물티슈로 몇 번 닦았더니 그제야 글씨가 보였다. 영어인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적혀 있는 대로 종이에 옮겨 적었다. 나중에 엄마나 아빠한테 물어봐야겠다.

 

To My Fiancee,

Anne.

 

목걸이를 다시 보물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당분간은 이 상자를 열고 싶지 않다.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열어보던 보물 상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이 상자를 열면 목걸이를 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선생님과 아저씨가 생각날 테니까. 그래도 유언이 된 아저씨의 부탁대로 목걸이는 잘 보관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렸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니 양쪽 귓가로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소리 내 울지 않았다. 엄마가 방에 들어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훌쩍이며 울다가 생각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 봤던 환영에 대해 연희한테 말해? 말해 줘도 안 믿을 거야. 그리고 나 혼자 목걸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샘나서 삐질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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