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얼마나 자주 헬기를 타는지 모르겠지만 도심 속 높은 건물엔 꼭 갖춰야 하는 필수품처럼 30층인 이 호텔에도 헬기장이 있었다. 호텔 옥상에 올라와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렇지 않은가? 직원도 아닌 내가 호텔 옥상에 올라갈 일이 뭐가 있다고. 또 이런 곳은 평소 잠가 뒀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 볼 엄두를 내본 적도 없다. 마침 오늘은 호텔에서 대기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고, 그 시간 동안 탁 트인 곳에서 누구의 간섭 없이, 좀 전에 느낀 행복의 여운을 마음에 천천히 되새기고 싶어서 올라왔다.옥상을 출입하는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12월의 차고 건조한 바람이 얼굴을 할퀴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따뜻한 물이 담긴 종이컵을 쥐고 있어서 손은 그다지 시리지..

2017년 6월 서울, 온누리초등학교졸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달 동안 교생 실습을 나왔다. 학생일 때 학교에 다닌 것과 교생으로 학교에 출근하는 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학생 때 학교가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놀이 공간이었다면, 교생에게 학교는 시험지 없는 한 달짜리 시험장이다. 수업 운영, 학생 관리, 담임 보조까지 학교에서 내가 하는 모든 언행이 평가 대상이 된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모든 순간이 평가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어항 속 금붕어처럼 답답할 것 같아서 아예 그런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힘든 건 사실이었다.그렇지만 내가 정말 힘들었던 건 평가 때문이 아니다. 교생이라는 ‘낀 위치’에서 느끼는 압박감과 정체성 혼란 때문이었다. 난 교사의 탈을 쓴 학생이었고, 그래서 교사의 업무..

1998년 5월 21일제주도 서귀포시 아침부터 시커먼 구름이 해를 가렸다. 하늘만 보고선 몇 신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기 예보에선 비 소식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엄마는 이 동네 날씨는 일기 예보대로 된 적이 거의 없다며 아빠 출근길에 우산을 챙겨 주셨다. 아빠가 출근한 뒤 나도 유치원 버스를 탔다. 김인애 선생님 대신 임시 선생님이 오신 지도 벌써 나흘째다. 임시 선생님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선생님이 빨리 돌아오시길 속으로 바라고 있다. 작년부터 김인애 선생님 반이기도 했고 선생님은 나한테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유치원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들과 놀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 한쪽에서 선생님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간중간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고, 손으로..
제주도 제주시, N 웨딩 컨벤션 우리 차가 늦는 바람에 친구들과 축가를 맞춰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식 직전 무대에 올라 보는 마지막 연습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입장 방법, 무대에서 각자가 서는 위치, 율동 등을 점검하기 위해 예식홀로 들어갔다. 입구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웨딩홀 안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화려하면서도 규칙적인 모양으로 빛나는 조명 빛에 살짝 위축됐다. 이런 곳에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평소 교회 강당에서 했던 연습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격려했다. 예식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5분. 총연습을 끝내고 우리는 예식홀 앞 로비로 나왔다. 조금 전과 달리 로비는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볐다. 사람들이 많아서 길을 잃지..
1998년 5월 17일제주도 서귀포시, 우리 집 드디어 오늘, 우리는 그동안 연습한 노래와 율동을 공개한다. 선생님 결혼식을 위해 우리 반 친구들은 주말마다 유치원 근처 교회 강당에서 노래와 율동 연습을 했다. 노래는 동요 참 좋은 말>로 정했다.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이기도 했고 노래 가사가 결혼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노래에 어울리는 앙증맞은 율동과 중간에 바뀌는 대형 연습에 초점을 맞췄다. 결혼식은 12시 30분인데 우리 가족은 두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아빠는 서귀포에서 제주로 갈 때 날이 좋으면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이용한다. 난 이 길이 싫다. 길도 좁고 한라산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곡선 코스가 많아 이 길로 다니면 난 종종 멀미가..
1998년 4월 3일제주도 서귀포시, 동심 유치원 햇살반오전 10시 음악 시간 “햇살반 친구들, 손뼉 머리!”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할 때 우리들을 박수로 집중시킨다. 우리들은 3월에 약속한 대로 짝짝, 박수 두 번을 치고 두 손을 머리에 올린다.“손뼉 어깨!”이번엔 박수 두 번을 친 다음 손을 어깨에 댄다.“손뼉 허리!”또 박수 두 번을 치고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댄다. 이제 준비 끝이다.“요즘 땅에서 새싹들이 올라오고 꽃들도 많이 피었죠?”“네~”“이제 봄이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봄노래를 하나 배워볼까 해요. 노래 제목도 이에요. 잘 듣고 따라 불러 보세요.”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병아리 떼 뿅뿅뿅뿅 놀고 간 뒤에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선생님이 알려주신 ..

병원이다. 신부가 보인다. 병상에 누워 있다. 핏기 없는 얼굴로 동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다. 이번엔 병원 복도다. 신랑도 보인다. 신랑은 동료 의사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진료실로 들어가 진료를 준비한다. 곧이어 간호사가 환자 한 명을 데리고 들어온다. 신랑은 몇 가지 질문을 하며 환자와 대화를 나눈다. 간호사가 먼저 나간다. 신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에게 다가간다. 환자도 일어난다. 서로 끌어안는다. 신랑의 가운엔 신경외과의 김태혁이란 이름과 명인병원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거 뭐지?그대를 만나죽도록 사랑하는 게누군가 주신나의 행복이죠.눈을 떴다.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두 사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채 립싱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목걸이 펜던트가 만져진다. 내가 눈 감고 ..

2017년 10월 첫째 주 토요일서울, H 호텔 웨딩홀 “다음으로 신랑 김태혁 군과 신부 조아름 양의 하나 됨을 축복하는 축가를 들으시겠습니다.”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듯한 사회자의 어색한 멘트가 끝나자, 홀을 오렌지색으로 장식하던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스피커에서 전주가 흘러나온다.난 축가를 부르러 왔다. 그것도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정식으로 인사 한번 해 본 적 없는 김태혁이란 사람의 결혼식에. 나하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신랑의 후배인 주현이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수락했지만, 썩 내켰던 건 아니었다.축가는 내 밥벌이 중 하나다. 일을 많이 할수록 수입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아무 결혼식이나 가리지 않고 참석하는 건 아니다. 아는 사람이 낀 결혼식에서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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