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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구 라디오

넓은 이마에서 흰머리까지

왕구생각 2022. 2. 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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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자기 외모에 대한 장점을 짧은 글로 써 오는 게 숙제였는데, 난 고심 고심하다 결국 내 이마를 장점으로 썼다. '넓은 이마 덕분에 착해 보인다'는 내용으로 썼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용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당시는 배우 이상아가 왕조현, 소피마르소, 이미연, 브룩 쉴즈 등과 더불어 학생들의 책받침 스타로 전성기를 누릴 때였는데, 이상아의 매력은 귀엽고 상큼한 미소였다. 하이틴 스타로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녀는 소녀티 물씬 풍기는 머리띠로 귀여운 매력을 뿜뿜댔지만, 대중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언제나 그녀의 미소보다  이마에 주목했었다. 앞머리를 내려 가리려 했지만 둥글고 하얀게 드러난 그녀의 이마는 그녀에게 선한 이미지를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상아의 귀엽고 착한 이미지→넓은 이마→나의 이마]라는 단순하고도 수준 낮은 연상작용으로 그런 숙제를 해 갔다.


하지만 그 숙제 이후 나는 내 머리에 특이한 콤플렉스를 갖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던 10살짜리 꼬맹이가 나이가 듦에 따라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 잘생김, 멋'이란 걸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 그 컴플렉스의 집착과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순진하게도 넓은 이마를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녔으니 (지금도 기억 나는 그 숙제를) 사춘기 시절에는 얼마나 민망스러워 했을지 누구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황비홍은 이마가 넓은 것이 아니라 변발이다.

그나마 초등학교 때까지 내 이마를 지켜주던 앞머리는 중학생이 되면서 나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입학 전에 모두가 스포츠형 머리로 깎아야 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에 감춰졌던 내 이마는 자유를 외치며 햇빛을 보게 됐지만 나는 떳떳한 이마와 반대로 지은 죄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다녔다. 또 얼마 되지도 않는 앞 머리카락을 최대한 아래로 누르며 이마를 가리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조직에나 있지만) 말을 함부로 내뱉는 동기 중 한 놈은 내 이마를 보고, 그것도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내게, "너 나중에 대머리 되는 거 아니냐?"며 악담을 해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불끈 솟아오르는 화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 했다. 단지 걱정이 점점 커져 나를 잠식해 왔다. '정말 내 이마가 대머리가 될 만큼 넓단 말인가?', '진짜 난 이대로 대머리가 되는 건가?' 그래서 확실한 지식도 근거도 없는 녀석에게, 사채 이자를 받으러 온 깡패에게 이자 기일을 조금만 늦춰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정말 이마가 넓으면 대머리 되냐?"라고 물었던 기억도 있다.

물론 그로부터 25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 대머리가 아니다. 오히려 대머리로 상당 부분 진행된 동기들보다 머리숱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참고로 우리 가족과 친척 중엔 그 누구도 대머리가 없다. 유전적인 영향으로만 따지자면 내가 되머리가 될 가능성은 급격히 줄어든다는 얘기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지만 넓은 이마에 대해선 조금도 변한 게 없어서 대머리에 대한 기약 없는 두려움은 줄곧 나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브루스 윌리스(왼쪽)와 사뮤엘 잭슨(오른쪽)

그러다 어느 순간 '왜 대머리를 걱정해야 하지?'라는 자각이 들었다. 영화를 볼 때였다. 다이하드 4.0의 브루스 윌리스, 어벤저스의 사무엘 잭슨은 둘 다 대머리인데도 놀림감은 커녕 멋진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나이가 든 그들에겐 대머리가 잘 어울린다. 인종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그들이 배우여서일까?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대머리가 아니었을 때도 멋졌고, 대머리인 지금도 멋진, 말 그대로 그냥 잘 생긴 사람들이어서일까? 답이야 어떻든 대머리인 게 죄도 아닌데, 한쪽에선 숨기기에 바쁘고, 어떤 이들은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전세계로 자신의 대머리를 자랑스럽게 빛내고 있다.(대머리이기 때문에 빛낸다고 한 건 아니다.)

'다양성 인정을 적극적으로 계몽하고 있는 이 시대에 대머리를 흉으로 보는 건 어찌 보면 고정관념이자 말 그대로 콤플렉스 아닌가'라는 아전인수격인 깨달음이 영화를 보다말고 내 머리속을 지나갔다. (어쩌면 지금은 내가 대머리 그룹에 속해 있지 않아서 그런 건방진 말을 내뱉는 것일 수도 있다.) 외모에 대한 민감도는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치우쳐져 있는 건 아닐까? (내 경우엔 그렇다.) 오히려 타인은 나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실수, 속된 마음, 공공의 선에 반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경우, 자신에겐 관대하지만 남에겐 날을 세우며 해대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행동이나 마음가짐과 달리 외모에 있어서만큼은 남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 남에게 보여줄 외모에 민감하단 얘기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결국 시간이라는 절대 권력 앞에서 외모는 무너지게 돼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온갖 스트레스가 덕지덕지 들러 붙는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어깨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면, 외모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기준을 조금 낮추든지, 신경을 덜 쓰는 편이 도움이 된다. 자기애가 강한 건 득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애를 자기비하로 격하시키는 건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머리에 대한 걱정을 한숨 돌리자 내겐 또 다른 머리 콤플렉스가 찾아왔다. 아무리 외모에 둔감하려 해도 이번엔 야속하게 흐르는 나이 때문에 생긴 노화 현상이라 무심하기 쉽지 않다. 흰머리.

처음엔 새치라 생각했는데, 마흔이 넘어가면서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기저기 동시에 여러 가닥 흰머리가 생기는 걸 보니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하는 서러움이 가슴 한구석에서 일렁였다. 아직 한창인 나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여전히 그 때와 변함 없을 거라 착각하며 살고 있기에 서글픈 우리들이 아닌가? 처음엔 조금이라도 나이든 티를 벗어내기 위해 한두 가닥을 뽑아댔지만, 시간 앞에서 결국 무의미한 짓이었다. 뽑아둔 자리에서 다시 흰머리가 자라고 다른 곳에서도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건 내 머리가 대머리가 되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그냥 흰머리를 그냥 두고 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가느다란 몇 가닥이지만,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울을 볼 때면 왜 이리도 흰머리가 많이 보이는지 점점 늙어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를 1분 이상 타고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다 다시 앞에서 (두 대머리 배우에게서) 깨달은 지혜를 다시 한 번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봤는데, 그녀의 백발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연륜이 묻어나는 백발은 찰랑찰랑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그만의 멋을 품고 있다. 특히  나이듦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낸 백발은 자신감과 더불어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아닐까?

결국 가꾼 외모는, 보여지는 데 한계가 있다. 젊은 땐 그 한계를 모른다. 그 한계 너머엔 삶이 있다. 일생을 통해 누적한 자신의 행적이 순간순간 얼굴에 묻어나며 '인상'이라는 표정 창고에 쌓이고 쌓여, 결국 노년의 얼굴은 자신을 삶을 대변한다. 지금 내가 알게 된 삶의 깨달음을 이미 한  세기 전에 알고 말로 남긴 사람이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남긴 말은 내가 여지껏 했던 말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고 있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우연히 얻은 외모를 가꾸어야 할까? 아니면 인생을 가꾸어야 할까?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자.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은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 jmaso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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