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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다. 그 간격이 가깝게는 한 달 전 혹은 1년 전인 것도 있고, 멀게는 30여 년 전인 고등학교 때로 훌쩍 건너 뛸 때도 있다. 그렇게 멀리 건너뛰어 읽은 책이 이번에 읽은 <노르웨이의 숲>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점에 갔다가 낯익은 작가의 유명한 소설이라 그냥 집어 들고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내 판단으로 당시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토요일에 하교하는 길에 큰 서점에 들러 책을 사 읽곤 했다. 주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책들을 중심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의 허세였던 것 같다.
아무튼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내 소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떻게 주인공 주변엔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고, 이 인간은 어떻게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냐?'
정말이다.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는데, 그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됐다. 정말 주인공 주변 인물인 친구 기즈키, 그의 여자 친구 나오코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나가사와 선배의 여자 친구 하쓰미 모두 자살을 했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들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모두들 경제적인 면에서 가정 형편이 좋은 편에 속했다. 부모의 직업이 의사나 전문직이라 경제적인 부족함 없이 살았던 사람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느 사람은 생업에 허덕이는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예전에 읽은 어떤 책에서 경제 수준이 올라갈수록 우울증 환자가 많아지고 그들을 위한 약도 많아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예는 미국이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이해는 간다. 먹고 사는 게 힘들 땐 다른 생각을 하기 쉽지가 않지만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수준에 다다른 순간, 자신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는 거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나 잘 살고 있는 건가?'하고. 그러다 길을 못 찾고 방황하다가 뭔가 마음 속에 구멍이 생겨 그 구멍의 깊이가 커지고 몸을 뚫을 정도로 깊어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취하는. 그냥 그럴 거라는 추측 뿐이다. 실제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까.
그런데 그럴 경우 남은 사람이 더 괴로울 것 같다. 죽은 사람은 그걸로 끝이지만 남은 사람은 그 사람을 계속 생각할 테니. 그런 면에서 나오코는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 했던 거고, 와나타베는 나중에 방황하긴 했지만 결국 이겨냈다. 결국 주인공인 그에게 마음이 가는 건 독자로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난 와타나베가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어떻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들과 동침할 수 있을까. 이건 고등학생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내 사고가 좀 예전에 갇혀 있다고 볼 수 도 있겠지만, 이거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가사와 같은 놈은 더더욱. 하쓰미 같은 경우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무리와 달리 그렇게 문란하지 않은 걸로 봐서 모두가 그렇 문화 속에 사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뒤 한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안 읽었다. 그의 잡문집들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소설은 일부러 피하고 싶었다. 왠지 그의 소설엔 그런 성적인 묘사와 표현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만 15살짜리가 받아들이기엔 좀 충격이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1Q84>도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많이 나왔지만 그땐 다행히 그런 표현을 받아들일 나이가 됐다.
생각을 해 보니 1960년대 후반 일본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나라였다. 산업이 발달했고 그래서 일자리가 많았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겠지만 경제적 부흥처럼 갑작스런 성장의 이면에는 동전의 뒷면처럼 어두운 부분도 함께 따라오게 돼 있다. 그 부분이 얼마나 부각되냐의 문제이지. 이 소설에서는 개인적인 면에서는 자살, 사회적인 면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인 것 같다. 소설 각 부분에 대학생의 시위 장면이 많이 나온다. 혁명 시위라는 이름으로 헬멧을 쓰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이. 하지만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이걸 두고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개인주의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그런 건가? 그런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동료 학생들의 시위를 개똥 보듯 하는 와타나베를 보면서 내 대학 생활이 떠올랐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전국적으로 총 3번의 휴업이 있었다. 1학년, 2학년, 4학년 때. 나야 말로 정말 와타나베처럼 그런 부분은 상관하지 않고 살던 사람이라 무엇을 위한 휴업이고, 무엇을 얻어냈는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수업을 안 하니 학교를 안 가도 되서 좋았고,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던 기억만 남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샀을 때는 제목이 <상실의 시대>인 줄로만 알았다. 알고보니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로 출간했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상실의 시대'가 더 와 닿는다. 친구와 좋아하는 사람을 잃고,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을 그렸다는 부분에서. 10대에서 20대가 되는 과정에서 겪은 고통을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지었으니 얼마나 서정적인가.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들은 짧은 글에서부터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제목이 다들 좀 이상하긴 했다. 예전에 읽은 잡문집 무라카미 라디오 제목 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같은 것들만 봐도 그렇다.
이 책 <노르웨이의 숲>도 사실 전체적인 내용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줄 모르겠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무슨 연관이 있는 줄 잘 모르겠다. 비틀즈가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하루키가 그들의 노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 정도는 이하하겠는데, 소설 내용과 관련이 있을까? 관련이 있다면 내 이해가 짧은 거겠고.

비틀즈 <노르웨이의 숲>

그러다 방송에서 이런 걸 또 보게 됐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은 사실 '숲'이 아니라 '가구'라는 뜻이다, 라는...

알수록 어렵다. 그냥 <상실의 시대>가 정말 괜찮다는 결론만 내릴 뿐. 그 제목 누가 지었는지 참 상 주고 싶다.
하루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책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맨시키가 사는 곳이 아카가와 쇼코가 사는 집 맞은 편 산에 있는 집을 구입해서 산다는 설정은 개츠비가 데이지가 사는 곳 맞은 편 해변에 집을 마련했다는 것을 오마추했다. 이 책에서도 하루키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의 순수에 대한 동경을 와타나베를 통해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의 성장소설이지만 고등학교 때 죽은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 친구에 마음을 둔 과거의 와타나베와 20살 성인이 될 때 쯤 나타난 미도리와의 사랑이 대비를 이룬다. 과거에 마음을 둔 순수한 와타나베가 과거를 깨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응원을 해 주고 싶다. 순수는 그립고 지켜주고 싶고 깨서는 안 될 것 같은 상태지만, 우리는 현실을 그보다 더 현실적인 가치를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삶 아니겠는가. 그래서 과거를 대변하는 두 인물은 죽음으로, 현재를 보여주는 미도리와는 사랑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과연 이런 인물들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고등학교 때 자살하는 친한 친구, 그녀의 여자 친구랑 나는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줄타를 하지만 그녀 또한 당시의 슬픔을 못 잊고 자살한다. 그리고 아무 이성하고나 내키는 대로 하룻밤을 보내는 삶, 성적인 대화를 농담인 것 같지 않게 아무렇게나 하는 이성 친구. 과연 이런 인물이 있을까? 없다고는 말 못 한다. 왠지 있을 것 같지만 본 적은 없다. 실제로 본 적이 없지만 주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인물들이 상당히 많이 포진해 있다. 그래서 더 이 이야기에 끌린다. 소설이란 그런 거짓말의 세계니까.
거의 30여 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어렸을 땐 참 부끄러워하면서 혼자 죄짓는 듯한 마음으로 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나이가 아니다. 다만 아직도 난 적응이 안 된다. 소설가란 원랜 그렇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사람들이어야 하나. 무섭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들의 생각과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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